묘비 세우기 ㅣ 정은우 - 시작하다 SALE
정은우 소설집
정은우 저자(글)
창비 · 2023년 05월 15일
ISBN :  9788936439033
296쪽 / 128 * 189 * 22 mm / 435 g
13,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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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비신인소설상 오늘의작가상 수상 작가 정은우의 첫 소설집
상실 이후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한 따스하고 정갈한 위로

서사적 완결성과 빠져들 수밖에 없는 문체로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 제46회 오늘의작가상을 받으며 작가적 입지를 단단히 다진 소설가 정은우의 첫 소설집 『묘비 세우기』가 출간되었다. 등단 이후 꾸준히 쌓아온 내공으로 엮은 여덟편의 작품이 실린 이번 소설집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거나 무언가를 상실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갑작스러운 사고로 연인이나 친구를 잃은 인물들과 나이 듦에 따라 오래 함께한 배우자를 떠나보낸 인물, 어느 날 홀연 사라져버린 룸메이트를 되찾고자 하는 인물까지, 정은우는 깊은 애정과 우정을 나누던 존재를 잃고 혼자 남아 상실의 시간을 견디는 사람들을 단정하고 따뜻한 호흡으로 그려낸다. “단순한 생계로 치부될 수 없는 존엄하고 귀한 삶의 세부를 바라보는 애정적이고 견고한” 이야기로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며 “죽음과 애도, 삶의 지속 가능성”(등단작 심사평)이라는 생의 본질적인 문제들까지 세심하고 살뜰히 살피는 이번 소설집은 그 등장만으로도 든든하고 따스한 위로로 다가온다.


작가정보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장편소설 『국자전』 등이 있다.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다.
시작하다 문예아카데미에서 <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되는 법 > 강의를 진행한다.


작가의 말

좋게 말하자면 나는 끈기가 좀 있는 편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요령이 없다. 요령이 없는데 좀처럼 포기는 하려고 들지 않는다. 왜일까. 나는 소설이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고 믿진 않는다. 다만 누군가를 구하려는 이에게 용기를 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믿는다. 그래서 계속 쓰고 싶다. 소설 속 인물들이 계속 살아가듯이. 만사를 일정한 반복이라 여기며 통달한 척하고, 회의와 냉소에 안주하고 싶진 않다.
(…)
만일 이 책에 엔딩 크레디트가 있다면 아마 단편 하나 분량은 족히 나올 것이다. 크레디트에 적을 모든 분에게 앞으로도 계속 살아가자는 말을 전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의 애정 표현이다.

2023년 5월정은우


목차

묘비 세우기
피존
사계
이지의 다카코
심해로부터
캐리어
하비의 책
복된 새해
 
해설 | 소유정
작가의 말
수록작품 발표지면


책 속으로

그즈음부터 연주에게는 기묘한 습관이 하나 생겼다. 연주는 주로 컵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반만 먹고 남은 반에는 새 플라스틱 숟가락을 꽂아두곤 했다. 재언의 몫이었다. 한정 아이스크림은 그때가 아니면 팔지 않으니까 재언을 위해 남겨두겠다는 핑계였다. 재언은 그녀의 습관에 묘비 세우기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더는 차가운 음식을 먹지 않겠다는 재언의 다짐은 변치 않았고, 냉동고는 일종의 공동묘지가 되어갔다. (「묘비 세우기」 17~18면)
 
아직 버려야 할 게 많았다. 냉동고를 열자 줄줄이 서 있는 아이스크림 통들이 보였다. 연주는 그 컵들을 모조리 쓰레기봉투에 쓸어 담았다. 그리고 봉투를 싱크대까지 끌고 왔다. 아이스크림 통을 하나씩 열자 짓쑤시고 파낸 흔적과 그 가운데 당당하게 꽂힌 플라스틱 숟가락이 보였다. 얼마나 단단하게 얼어붙었는지 숟가락은 좀처럼 뽑히지 않았다. 연주는 어금니를 악물고 있는 힘껏 숟가락을 잡아당겼다. 재언의 일부는 이제 자신이 가본 적도 없는 산에 흩뿌려질 것이다. 묘소라고 할 만한 것도 없으니 묘비를 세울 일도 없었다. 그런데 인간도 아닌 아이스크림 주제에 묘비라니. 재언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별명을 붙였는지 궁금했다. 묘비는커녕 조금만 힘주어 당기면 부러지고 말 플라스틱 숟가락에 불과했다. (「묘비 세우기」 30면)
 
가로수 한그루 없는 도로로 햇빛이 무너지듯 쏟아졌다. 바람은커녕 차들이 지나갈 때마다 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있는 그늘이라곤 서로의 그림자가 다였다. 명조는 괜찮다고 말했다. 무엇이, 어떻게 괜찮아질지는 모르나 그 말 밖에 나오지 않았다. 미주와 명조는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미래에 대한 확신을, 남아 있는 부스러기를 찾으려고 했다. 그러나 보이는 건 핏발 선 흰자와 탁한 눈동자뿐. 받아들여야 했다. 이제는 꿈꾸는 일이 두려웠다. (「사계」 93면)
 
그녀는 조카손주인 이지와 영수 남매에게 자신을 이모할머니 대신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다.
“너희는 미국인이잖니.”
“진짜 이름이 뭐예요?”
“다카코면 족해.”
다카코는 귀찮은 눈치였다.
“너희 외할머니도 지금은 마리아잖아.”
아무리 미국이라 한들 이지와 영수는 외할머니를 한국 이름인 금화나 미국 이름인 마리아로 불러본 적이 없었다. 예의범절에 엄격하던 어머니도 다카코의 폭정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심지어 한술 더 떠서 남매에게 다카코가 머무는 동안 가급적 영어를 쓰지 말라고 했다. 한국어로 기본 회화밖에 할 줄 모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추수감사절 식탁에서 유창하게 대화하는 이들은 외할머니와 다카코뿐이었다. (「이지의 다카코」 101면)
 
비겁할지언정 죽는 것보다는 나았다. 죽지 않아야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 단순한 규칙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공고히 그 자리를 지켰다. 다카코는 두 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숨을 쉬었다.
“난 적어도 애들만큼은 쉽게 살 줄 알았어요.” (「심해로부터」146~147면)
 
위로는 마약성 진통제와 같았다. 계속 바라고 바라게 만드는 중독성이 있었다. 완치된 미래와 일상으로의 귀환을 약속했다. 위로에 중독될수록 환자들은 점점 더 무뎌져서 무너지기 쉬워졌다. 도무지 진전이 없는 치료와 계속 미뤄지기만 하는 퇴원일. 현재는 미래를 끊임없이 밀어냈다. 모든 희망을 잃고 무력해진 환자들은 멍하니 앉아서 완치의 기적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영원한 환자가 되었다. (「캐리어」181~182면)


출판사 서평

계속 사랑하고 계속 기억하기 위해
잘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이야기
 
『묘비 세우기』 속 등장인물들은 무언가를 잃는다. 동거하던 연인을 갑작스러운 추락 사고로 잃거나(「묘비 세우기」) 오랜 시간 함께 지냈던 배우자를 떠나보내기도 하고 헤어진 약혼자의 사망 소식을 듣기도 한다(「이지의 다카코」). 아주 가깝다고 생각했던 룸메이트가 어느 날 홀연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가 하면(「하비의 책」) 친했던 친구를 한순간의 선택으로 직장에서 내쫓게 되기도 하고(「피존」) 같은 병을 앓으며 친밀해진 친구의 장례식에 가게 되기도 한다(「캐리어」).
그러나 정은우의 인물들은 함부로 슬픔을 토해내지 않는다. ‘비밀’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깊숙이 마음을 가다듬으며 각자의 방식으로 떠나보낸 것들에 대한 애도를 표한다. 「묘비 세우기」의 재언은 이삿짐센터에서 일을 하던 중 리프트에 올랐다가 추락하는 변을 당한다. 사실혼 관계였던 연주에게는 그를 제대로 애도할 수 있는 권리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둘만의 ‘호사’는 신상 아이스크림을 사 먹는 일이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재언은 아이스크림을 먹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냉동 탑차에 갇히는 꿈을 계속 꾼다고, 아이스크림은 물론 차가운 음식을 먹기 어렵겠다고 말한다. 연주는 홀로 컵 아이스크림을 먹고 재언의 몫으로 반을 남겨두곤 그 사이에 새 플라스틱 숟가락을 꽂아둔다. 재언은 그런 연주를 보며 ‘묘비를 세운다’고 장난스레 말한다. 재언의 빈자리에는 아이스크림 묘비들만이 남아 있다. 연주는 아이스크림을 녹여 묘비를 허문다. 허공에 대고 재언의 옷을 입어도 좋을지 물으며 자신 앞에 놓인 삶의 다음 장면으로 넘어간다. 「이지의 다카코」의 다카코 역시 한평생 의지하던 배우자인 미노루의 죽음 앞에 의연해 보이는 자세를 취한다. 피난으로 떠나온 뒤로 다시 가지 않았던 제주에 가 바다를 바라보거나 짧게 기도하는 것으로 그를 배웅한다. 「캐리어」의 지언은 환우였던 경주의 장례식에 가던 길, 돌연 다른 사람들의 몫까지 모아둔 조위금 봉투를 모두 털어 캐리어를 구매하고 평소 입지 않던 밝은 색의 옷을 사고 맛있는 음식을 먹는다. 질환의 특성상 여행은 엄두도 내지 못했고 음식도 까다롭게 가려 먹던 지언은, 늘 ‘지금’ 하고 싶은 것을 하던 경주를 기리며 즉흥적으로 하고 싶은 일들을 해버린다.
 
깊은 묵시 속에서
존엄하게 기록되는 삶
 
가까운 이들의 죽음 앞에 언뜻 초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정은우의 인물들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모습이 “어쩐지 블랙박스나 CCTV를 보는 것”처럼 우리의 삶과 가깝기 때문일 것이다. 정은우는 지독한 슬픔 속에서도 마음을 감추고 일상을 살아내야만 하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슬픔”을 세밀하고 따스하게 “재생”(소유정 해설)시킨다. 상실 이후에도 다시 생활로 돌아가 떠난 이의 자리를 정리하고 메우며 하루하루 다르게 다가올 슬픔의 무게를 견뎌야만 하는 사람들의 ‘현재진행형인 슬픔’을 그려낸다. 생활 곳곳에 스며 있어 눈물이나 통곡으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슬픔의 얼굴을 묘사하는 정은우의 이야기들은 그 어떠한 위로보다도 진하게 다가온다. 살아가다보면 마주할 수밖에 없는 슬픔의 모양새를 기꺼이 응시하며 탄탄하게 직조하여 끝내 “존엄하고 귀한 삶”을 어루만지는 작가의 시작이 반갑고 든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