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자전 ㅣ 정은우 - 시작하다 SALE
정은우 장편소설
정은우 저자(글)
문학동네 · 2022년 09월 05일
ISBN : 9788954688031
400쪽 / 146 * 210 * 28 mm / 644 g
14,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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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소설가 정은우의 첫 장편소설.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한국의 근현대를 배경으로,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겪는 사랑과 투쟁의 이야기를 담은 〈국자전〉은 강력한 이야기의 힘으로 장편소설 연재 전문 웹진 『주간 문학동네』의 첫 투고 선정작이 되었다.
특히 〈국자전〉은 '손맛'으로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는, 전에 없던 유니크한 캐릭터의 한국형 여성 히어로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시크하면서도 귀여운 매력을 지닌 주인공 '국자'를 통해 삶을 긍정하는 유머와 세계를 대면하는 진지한 태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 〈국자전〉은 가장 특별한 능력 이야기가 가장 보통의 존재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인간과 닮은 이야기이다.
초등학교 교사인 '미지'는 담임을 맡은 반에서 왕따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받고 휴직한 상태다. 복직을 앞둔 그녀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첫 독립부터 이뤄내고자 엄마 '국자'와 식탁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독립이라는 말만 꺼내면 국자의 휘황찬란한 밥상이 그녀의 의지를 녹여버린 바 있다.
그런데 이번 독립 선언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자신이 기능력직 공무원이며 음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비틀 수 있다는 국자의 고백에 미지의 머릿속은 새하얘지는데…… "혹시 나한테도 쓴 적 있어?" 묻는 미지에게 국자는 태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고, 아연실색하는 미지의 표정 너머로 국자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작가소개 _ 정은우

198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작하다 문예아카데미에서 소설 창작 수업 < 최고의 거짓말쟁이가 되는 법 >을 강의한다.


작가의 말

이야기는 누군가를 살아 있게 하고, 살아가게 합니다. 길든 짧든 당신과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한편, 읽는 사람들이 어떤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지 깨닫게 하니까요. 혼자 생각하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를 보거나 듣고 읽으면서,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겪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이 누구인지 깨달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설령 그로 인해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다 한들 당장은 모르는 일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들도 한때는 현재였고, 아득한 미래는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올 테니까요. (……)
 
2022년을 지나가면서
정은우 올림


목차

국자전
작가의 말


추천사

김겨울 (작가)
정신없이 읽었다. 마지막까지 신나게 읽고 책을 탁 덮자마자 작가에게 다음 권을 내놓으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이 책, 그러니까 이국자의 인생에는 사랑도 있고 이별도 있고 눈물도 있으며, 우정도 있고 의지도 있고 그런 걸 다 망치게 마련인 역사의 곡절과 권위주의적 국가 권력도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이국자의 음식처럼 푸짐하고 맛깔나며 유혹적이다. 기가 막힌 음식을 한끼 든든하게 차려먹은 것처럼 뱃속 뿌리에서 뿌듯하고 뜨끈한 힘이 느껴진다. 어쩌면 이 소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이국자의 밥상을 얻어먹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이렇게 소설에 대한 좋은 말을 줄줄 늘어놓고 있는 것인지도. 하지만 초능력까지 발휘하면서 그런 요청을 하기에 이국자는 너무 곧고 무심하고 멋지다. 독자 여러분도 얼른 이국자와 그의 친구들을 만나보아야 한다. 지금도 뭔가를 무치고 볶고 끓이고 있을 이국자씨의 평안을 빌며.
 
박서련 (소설가)
어쩌면 정은우는 맛있는 이야기로 읽는 이의 마음을 훔치는 능력자가 아닐까. 솜씨 좋은 어머니로부터 독립하고 싶은 딸의 새콤한 분투기이고, 국가에 보탬이 되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를 차별한 시대에 대한 씁쓸한 회고담이며, 화끈하고 매콤하게 제 갈 길 가는 주인공의 여성서사이되, 은근히 달달한 로맨스가 빠지지 않는 한편, 분방하면서도 촘촘한 상상력으로 부려놓은 세계관이 짭짤하다. 오미(五味)를 조화롭게 갖춘 한 상의 판타지. 간이나 볼까 하고 가볍게 든 숟가락이 어느덧 바빠질 것이다.


책 속으로

“그럼 요리 좀 가르쳐줘요. 일단 이 미역국.”
“인터넷 찾아봐.”
“아니, 엄마. 그렇게 해결될 문제였으면……” 미지는 열다섯 살 때 어버이날 기념으로 끓였던 김치찌개를 떠올렸다. 인터넷에 나온 조리법대로 만들었으나 국물은 김치를 헹군 물처럼 밍밍했고 푹 끓인 김치도 왠지 뻣뻣해서 가위로도 쉽게 자를 수 없었다. 아버지는 시작이 반이라며 칭찬해놓고는 정작 국그릇의 반도 채 비우지 못했다. 국자는 아예 입도 대지 않았다.
“엄마는 어떻게 하는데요?”
“물 끓으면 미역 넣고 푹 끓여.”
“정말 쉽다. 된장찌개는 된장 넣고 끓이고 파전은 반죽에 파 넣고 부치면 되겠네.”(15쪽)
 
영웅은 국가에서 고르는 도구였다. 기능력직 공무원으로 뽑힌들 시시콜콜 반발하거나 친정부적이지 않으면 도구로 적합하지 않았다. 국가는 위험 요소를 철저하게 배제했다. 국자는 텔레비전에 영웅이라며 몇몇 기능력직 공무원들이 나올 때마다 채널을 돌렸다. 그들을 싫어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의심 하나 없이 환한 그들의 미소가 불편했다. 국자는 반장의 확신이 깨지지 않길 바랐다. 확신은 소망에서 비롯하고, 소망은 아무리 강력해도 언제든 허상처럼 흩어질 수 있었다. 그러니 어떤 확신도 근거가 부족한 믿음에 불과했다. 그리고 확신은 무력해지는 순간 모든 걸 망쳐버렸다.(64쪽)
 
“너는 여기 수감된 사람 중 착한 사람이 몇이나 있을 것 같니?”
“음.” 소년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면서 헤아렸다. 아직 성한 손가락이 열 개나 남아 있었다. “열 명이요?”
“그렇다면 누가 착한 사람만 내보내주고, 나머지는 다 나쁘니 여기서 죽어야 한다고 말하면 어떻겠니, 그건 옳을까?”
도마 신부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모르겠어요.”
“어떤 게?”
“열 명보다 많을지도 몰라요.” 소년이 웅얼거리듯 대답했다. “그러니까 어쩌면…… 열 명의 갑절일 거예요.”(69~70쪽)
 
이내 수일이 다시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더니 뭔가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손가락만한 크기의 상자였다.
“아는 사람에게 받았는데, 괜찮으시다면.”
“이걸 받았다고요?” 국자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아무리 치장에 관심이 없더라도 립스틱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수일이 준 립스틱은 글로리아에게 받은 립스틱보다 훨씬 옅은 분홍색이라 덜 부담스러웠다. 어쩐지 장난기가 돌아 립스틱을 슬쩍 수일에게 내밀며 말했다. “어울리실 것 같기는 한데.”
“제가 생각해도 변명치고는 좀 형편없었습니다.”(158~159쪽)
 
“나는 그렇다고 쳐. 그래도 아빠까지 속일 필요는 없잖아요.”
“다른 방법은 없었어. 아니, 몰랐지. 말한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국자의 목소리에서는 뉘우치거나 후회하는 기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담담했다. “너야 좀더 쉬울지도 모르지. 더 많이 공부했고, 세상도 좀 나아졌으니까.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했지. 꼭 그래라, 난 네가 그랬으면 좋겠어.”(278쪽)
 
온전한 평화란 불가능했다. 반동이 사라져도 금세 그들을 대체할 또다른 적이 생길 테니까. 적은 늘 새로워지지만 싸움은 구태의연할 것이다. 그게 이 나라가 가르치는 평화의 방식이었다. 모두가 은연중에 알고 있지만, 애써 알려고 하지 않는 사실이기도 했다. 알아도 어떻게 바꿔야 할지 모르니까. 사람들은 불안정한 변화보다 확실한 고착이 낫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도록 길들여졌다. 국자는 수일의 손을 잡았다.(335쪽)


출판사 서평

“정신없이 읽었다. 마지막까지 신나게 읽고 책을 탁 덮자마자 작가에게 다음 권을 내놓으라고 하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_김겨울(작가)
 
“오미(五味)를 조화롭게 갖춘 한 상의 판타지. 간이나 볼까 하고 가볍게 든 숟가락이 어느덧 바빠지게 될 것이다.” _박서련(소설가)
 
당신을 사로잡을 신인의 등장,
『주간 문학동네』 첫 투고 선정작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을 받으며 등단한 소설가 정은우의 첫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정치적으로 엄혹했던 한국의 근현대를 배경으로,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이들이 겪는 사랑과 투쟁의 이야기를 담은 『국자전』은 강력한 이야기의 힘으로 장편소설 연재 전문 웹진 『주간 문학동네』의 첫 투고 선정작이 되었다. 특히 『국자전』은 ‘손맛’으로 사람의 생각을 바꾼다는, 전에 없던 유니크한 캐릭터의 한국형 여성 히어로를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시크하면서도 귀여운 매력을 지닌 주인공 ‘국자’를 통해 삶을 긍정하는 유머와 세계를 대면하는 진지한 태도라는 두 마리 토끼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 『국자전』은 가장 특별한 능력 이야기가 가장 보통의 존재에게로 귀결되는, 가장 인간과 닮은 이야기이다.
『국자전』에는 따뜻한 유머뿐만 아니라 서늘한 비판의식도 담겨 있다. 인간을 쓸모의 유무로 나누는 이분법적 사고와 억압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고자 하는 사람들의 분투기는 인간에게 너그럽지 못한 사회상을 아프도록 꼬집는다. 대중을 분열시킴으로써 유지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은, 영웅과 반동의 격전지가 재개발의 현장이 되는 등의 무차별적인 사리사욕의 추구와 맞물려 인간을 착취할 수 있는 도구로만 간주하는 시선을 강요한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비인간적인 세태가 통쾌하게 풍자될 때 다음을 향하는 길이 비로소 보일 것이다.
 
 
 
“입에 들어가서 소화되는 거라면 무엇이든 가능해.”
‘손맛’으로 승부하는 한국형 여성 히어로의 탄생
 
초등학교 교사인 ‘미지’는 담임을 맡은 반에서 왕따 사건이 발생해 충격을 받고 휴직한 상태다. 복직을 앞둔 그녀는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첫 독립부터 이뤄내고자 엄마 ‘국자’와 식탁에 앉았다. 이상하게도 그동안 독립이라는 말만 꺼내면 국자의 휘황찬란한 밥상이 그녀의 의지를 녹여버린 바 있다. 그런데 이번 독립 선언의 양상은 조금 다르다. 자신이 기능력직 공무원이며 음식으로 사람의 마음을 비틀 수 있다는 국자의 고백에 미지의 머릿속은 새하얘지는데…… “혹시 나한테도 쓴 적 있어?” 묻는 미지에게 국자는 태연히 그렇다고 대답하고, 아연실색하는 미지의 표정 너머로 국자의 이야기가 비로소 시작된다.
 
국자는 아홉 살에 첫사랑을 만났고, 열 살에 고아가 되었다. 순식간에 모든 걸 잃어버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도 그녀는 그 순간을 잊지 않았다.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억하기로 했다. 가능하면 빠짐없이.(22쪽)
 
소설의 배경인 1980년대 한국은 사람들 사이에 초능력자가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대체 세계이지만, 세계의 작동 논리는 오늘날의 현실을 쏙 빼닮았다. 정부는 능력자들을 통제하기 위해 그들 간에 ‘영웅’과 ‘반동’이라는 구별을 조장한다. 초능력을 타고난 이들은 ‘다중능력검사’로 검증되어 국가에 고용되고, 높은 등급을 받으면 대중에게서 ‘영웅’이라 불리며 선망의 대상이 된다. 반면 능력을 지녔어도 공직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으면 국가와 민중을 위협할 ‘반동’으로 몰린다. 어린 시절 능력자가 일으킨 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은 국자는 그저 남의 눈에 띄지 않고 조용히 살아가는 것이 남은 삶의 목표다. 그러나 그녀가 능력을 지녔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의도치 않게 기능력직 공무원이 된다.
좋아했던 오빠는 부적합 판정을 받은 뒤 능력을 제어하지 못해 마을 사람들을 몰살시키고, 홀로 살아남은 국자에게 미래란 그저 예정된 형벌과 다르지 않다. 훈련원 입소식, 세상을 향해 무감한 얼굴을 한 국자의 뒤편에 맴도는 이들이 있다. 서로 둘도 없는 친구가 될 거라며 손을 내미는 화려한 차림새의 글로리아는 미래를 예언하는 천리안의 능력을 지녔고, 누구보다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며 맥가이버를 닮아 멋을 부리기 좋아하는 최훈은 자꾸만 국자의 곁에서 알짱거린다. 염력 능력자로 훈련생들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강수자 교관과, 무뚝뚝한 성격에 누구든 털끝이라도 닿을라치면 곧바로 메쳐버리는 괴력난신 김숙녀까지. 말 그대로 “날고 기는 사람들 천지”에서 국자의 운명은 어떻게 흘러갈 것인가.
 
“아빠도 엄마가 기능력직 공무원인 거 알아?”
“모를걸. 말한 적 없으니까.”
“왜 말을 안 했어?”
“규정이 그래.”
“지금 나한테는 말했잖아. 아빠도 가족인데, 왜 말 안 했어?”
(……)
“너희 아빠가 반동이라서.”
“반동?”
“아, 이건 아빠한테 비밀로 해라.” 국자는 입만 뻐끔거리는 미지에게 신신당부했다. “알겠지?”(134~135쪽)
 
국가의 도구가 되는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고 싶은 국자는 글로리아와 모의해 심사위원을 속여 최하 등급을 받는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안기부는 영웅과 반동이 수시로 오가는 김포국제공항 레스토랑에 국자를 배치한다. 그곳에서 그녀는 마치 역병을 이끄는 귀신처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는 반동인 윤수일을 만나고, 조금씩 그에게 끌리면서 일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나아간다.
 
“아니, 국자씨는 뉴스도 안 봐?”
“기숙사는 텔레비전이 휴게실에만 있어서요.”
“저 사람 윤수일이잖아. 반동! 말만 해도 사람들이 픽픽 죽어나간대.”
주방 직원이 손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방금도 머리를 쪼개버린다고 하지 않았어? 윤수일이 했던 손짓까지 따라 하는 모습에 국자는 고개를 저었다.(140쪽)
 
최훈이 윤수일의 식탁을 날려버려도, 부적합 판정자를 인간으로 대우할 것을 국가에 요구하다 윤수일이 큰 부상을 입어도 국자와 윤수일의 관계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가는 곳마다 범국가 규모의 분쟁과 유혈 사태를 일으키며 “전장의 악령들”로 불리는 능력자 남매의 방한이라는 위기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전 세계 언론이 한반도를 주목하고 전쟁의 위협이 가시화되는 가운데 정부는 이를 김포국제공항 주변 반동들을 소탕할 기회로 삼는다. 어느 날 국자에게 비밀리에 걸려온 전화의 목소리는 철수령을 내린다. 공항에 폭탄을 설치한 뒤 모든 희생을 반동 세력의 탓으로 몰고자 하는 정부의 음모를 알게 된 국자는 자신이 그간 고수해온 평안에 대한 갈망과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사이에서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목소리가 언급한 날짜는 보름 뒤였다. 그날은 휴가를 내고 공항에서 벗어나야 했다. 국자가 알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전부이나 가짜 전부, 전부의 일부에 불과했다. 진짜 전부는 자신의 삶을 짓뭉갤 만큼 더 거대하고 위험할 테지만, 그녀는 알고 싶었다.(288~289쪽)
 
 
 
초능력자들을 통제하는 20세기 대한민국,
‘영웅’과 ‘반동’이라는 이분법을 거부했던 사람들
 
희망과 절망은 한 장의 종이였다. 먼저 읽는 쪽이 앞면이고, 나중에 읽는 쪽이 뒷면이었다. 단면만 읽고 구겨서 버리는 건 일시적인 도피였다. 절망과 희망 중 어느 쪽을 먼저 읽어야 할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언젠가는 남은 면도 읽어야 했다. 묵묵히 다 읽어낸 후 받아들여야만 남은 시간을 살아갈 수 있었다.(241쪽)
 
갓 훈련원 새내기를 벗어난 국자와 친구들에게 들이닥친 아파트 붕괴 사고는 그간 한국에서 벌어진 인재(人災)들을 그 자체로 상징한다. 올림픽 유치에 혈안이 되어 ‘영웅’들을 해외로 순방 보낸 국가, 자신의 능력조차 잘 알지 못하는 아이들을 방패막이로 내세우는 어른들. 그 반대편에는 친구를 잃은 사고에 대한 자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마저 사지로 이끄는 공무원, 잦은 좌절에 닳아버렸지만 여전히 세상을 향한 미약한 희망을 놓지 못하는 기자, 초능력을 지녔지만 재난 앞에서 한없이 인간적일 수밖에 없는 이들이 있다. 구조 작업이 길어질수록 국가의 실패가 명확해지므로, 실패의 흔적 위에 새 건물을 세워 성공에 대한 열망만을 가득 채우겠다는 계산 앞에서 소설은 되묻는다. “성공이란 건 실패를 완벽하게 지우는 걸까. 지우고 또 지우면 결국 뭐가 남을지 국자는 궁금했다.”
국자와 윤수일의 이야기는 어려운 질문을 정직하게 마주하고 나름의 길을 찾아가는 순간이며, 그와 함께 막다른 길에서 사랑을 길어내는 장면이다. 부적합 판정자였던 외삼촌의 억울한 죽음에 복수한 윤수일을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 소설은 국가가 지시하는 영웅과 반동,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이분법으로부터 비껴 서서 사람의 다양한 면모와, 그러한 사람들이 빚어내는 다채로운 감정의 색채를 있는 그대로 재현해낸다.
 
아직도 의문투성이였다. 가령 자신의 손을 힘껏 뿌리칠 엄두도 내지 못해서 번거롭게 손가락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떼어내는 윤수일이 어떻게 중령의 뇌를 터뜨릴 수 있었는지.
“나는 당신을 잘 모르겠어요.” 국자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윤수일의 손을 잡았다. “대체 어떤 사람인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아. 하지만……”(337~338쪽)
 
현재와 과거가 교차되는 소설의 형식은 능력자이자 기성세대인 국자와, 아직 자신의 능력을 알지 못하는 자식 세대 미지의 대화이기도 하다. 세대를 아울러 똑 닮은 사건과 고민은 우리에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남아 있는 질문이야말로 가장 시급한 선결 과제임을 깨우친다. 그리고 풀리지 않는 문제를 해결할 능력은 정말로 ‘능력’이 아니라 미지(未知)를 가능성으로 치환하는 ‘의지’에 달려 있음도. “이제 선택은 우리 몫이고 우리가 감당할 거니까.” 그럴 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고통의 연속이 아니라 삶이 차려내는 밥상을 오롯이 맛보는 여유의 누림일 것이며, 그것이 인간에게 소설이 선사할 수 있는 확실한 선물일 테다. 유머와 눈물, 진지함과 사랑이 잔뜩 버무려진 한 상의 식탁 앞에 숟가락을 들고 앉은 독자들은 감탄도 잊은 채 한바탕 국자의 이야기에 빠져들어 자리를 떠날 줄 모르게 될 것이다.
 
그날 국자는 평소와 달리 계속 이야기했다. 커피를 여러 잔 마시고 간식을 먹으면서 이야기의 끈을 놓지 않았다. 가끔 말을 멈추고 빼먹기라도 한 부분이 있을지 가늠하듯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국자의 삶은 나름의 답에 대한 해설지라 볼 수 있었다. 물론 그 해설지는 완벽하지 않았다. 오판과 비약이 있고, 모순된 부분도 보였다. 그러나 국자가 아는 한 제일 나은 답이었다.(388~3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