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한 내일 ㅣ 정은우 - 시작하다 SA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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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은우 저자(글)
자음과모음 · 2024년 05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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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ㅣ 정은우

2019년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묘비 세우기』, 장편소설 『국자전』 등이 있다. 오늘의작가상을 수상했다.


작가의 말

한 번은 누가 뭐라고 하든 독일로 가지 그랬냐는 말을 들었다. 별로 아쉽진 않았다. 아마 독일에서도 똑같이 어렵게 살고 있었을 것이다. 무엇 하나 쉽게 미워하지 못하고 사랑한다는 이유로 놓지 못해서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아주 가끔 나는 살지 않았던 이야기들 속의 내가 궁금해졌다. 어느 쪽이든 나름대로 열심히 살아갔을 것이다. 은선이나 수산나, 한수, 수아처럼. 나는 그들 중 누구도 쉽게 미워할 수 없었다. 그저 그들의 안녕한 미래를 바랐다. 내가 살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소설들을 썼다.


목차

소설
민디
한스
수우

에세이 에세이 내가 살지 않은 삶의 이야기들

해설 투지를 잃지 않는 법 - 황예인


추천사 ㅣ 황예인 (문학평론가)

선명하게 적히지 않음으로써 어떤 말은 더 강력해진다. 아무리 추측해본들, 작가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상 그 문장은 결코 확정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수차례 다시 읽고, 빈자리를 상상하고, 그 근거를 마련하는 사이 떠오르는 문장들. 그런 의미에서 적히지 않은 말은 읽는 이가 쓰는 말이다. 작가는 어떤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이를 쓰게 만들고, 마침내 소설은 작가에게서 벗어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된다.


책 속으로

은선과 수산나가 고심 끝에 고른 곳은 독일이었다. 독일은 학비가 무료였다. 취직과 영주권 문제를 한꺼번에 해결하려면 학위부터 받는 편이 유리했다. 둘 다 할 줄 아는 독일어라고는 인사말이 전부였지만, 처음 후보지였던 미국과 캐나다는 학비가 너무 비쌌다. 유학 상담 센터에서는 베를린을 추천했다. 베를린은 이민자가 많은 도시였다. 모두와 다른 대신 모두가 다른 편이 나았다. 이해받거나 이해시킬 필요가 없으니까. 은선은 새로운 곳에서 새롭게 삶을 시작하고 싶었다. 수산나와 함께.
_9쪽

독일의 여름은 빛처럼 짧고 눈부셨다. 하늘은 푸르고 손발은 따뜻했다. 오렌지를 망에 넣어서 창문 바깥에 걸어두면 바람이 불 때마다 상큼한 향기가 났다. 은선과 수산나는 노천 식당에 앉아 맥주와 감자 요리를 먹으면서 먼 미래를, 너무 멀어서 가볍게 들리는 미래에 관해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식당에서 음악 소리를 높이면 일어나서 손을 맞잡은 채 춤을 추었다. 옆 테이블의 노부부처럼. 마샤의 집에서 들리는 저 곡조로.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오게 될까,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게 될 날이.
_39쪽

사실 좋지 않은 징조였다. 치료사로서 환자에게 어느 정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지만, 미하엘은 좀 과했다. 어떤 환자들은 재활을 마치면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착각은 어릴수록 심했다. 그들은 치료사를 신처럼 여겼다. 자신을 씻은 듯이 낫게 해달라며 따랐다. 찬란했던 순간과 미처 이루지 못한 꿈을 들먹이며 호소했다.
_60~61쪽

“내가 애들 때문에 당신한테 신경을 못 썼네. 어떡하니, 그동안 힘들었지.”미안하다고, 은혜는 몇 번이고 사과했다. 한수는 은혜의 머리카락에 얼굴을 파묻은 채 눈을 감았다. 위층에는 아이들이 잠들어 있고, 밖은 고요하며 자신과 은혜는 함께였다. 행복했다. 이 행복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독일 민담집에 나오는 한스들도 행복한 결말을 위해 약삭빠르게 눈치를 보거나 가여운 척 동정을 구하고 시치미를 떼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한수라고 해서 못할 건 없었다.
_73쪽

수아가 와 있는 동안 숙자는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살짝 열린 방문 사이로 오래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라나 말로는 쉬는 중이라고 했다. 가끔은 부엌으로 나와 컵케이크를 구웠다. 달콤한 냄새에 라나가 홀린 듯 서성이면 수아를 불러 데려가게 했다. 수아가 부엌에서 라나를 데리고 나가면 다시 소설책을 폈다. 그리고 다 구워지면 얼른 와서 먹으라고 불렀다. 수아가 독일에서 먹은 컵케이크 중 제일 맛있는 컵케이크였다.
_101쪽

숙자는 노래하듯이 말했다. 수아는 숙자가 살아온 시간이 눈과 귀를 타고 새어 들어와서 흘러나가도록 내버려두었다. 손쓸 수도 없이 멀리 가버린 말과 순간들. 그녀는 숙자가 부러웠다. 얼른 늙고 싶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해결할 수 없는 채로 어서 흘러가버렸으면 했다. 괜한 희망과 낙관에 빠져 버둥거리는 건 이제 질렸다.
_127쪽

대화가 사전 질문지를 벗어난 순간, 진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사는 곳이나 목표는 달라도 우리가 마주한 불안은 비슷했다. 언제 어디서 감염될지 모르는 치명적인 바이러스와 끝없는 봉쇄. 그들은 내게 새롭게 미워하게 된 것과 오랫동안 사랑했던 것에 관해 말해주었다.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외치는 사람들, 공원의 거대한 나무들, 거스름돈을 잘못 주고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않는 점원, 바흐의 미사곡이 울려 퍼지는 성당.
_139~140쪽

사랑하는 것들보다 미워하는 게 많아지면 사랑했던 것마저 퇴색한다. 그 순간 삶은 무력해진다. 무력해지면 걷잡을 수 없는 불안이 찾아온다. 불안을 떨쳐버리고 싶어서 누구든 탓하려 하고, 탓하면서 더더욱 미워하는 게 늘어난다. 삶은 지옥이 된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이상 삶의 목표는 살아가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다._141쪽


출판사 서평

불안을 껴안은 삶에 인사하며
촘촘하게 확장되어가는 이방인의 세계

“그런 순간이 언젠가는 다시 돌아올까.
두려워하지 않고
함께 미래를 이야기하게 될 날이.”

「민디」는 한국에서의 지긋지긋한 삶을 청산하고 독일로 떠난 은선과 수산나의 이야기이다. 도망치듯 독일에 온 퀴어 여성 둘은 고양이 ‘민디’를 키우며 행복이 가득할 줄 알았지만, 갑작스레 덮친 감염병으로 심해진 인종차별 앞에서 망연자실한다. 백신을 맞기조차 어려운 환경이 되자 은선은 한국에 잠시 돌아가 백신을 맞고 다시 돌아오자고 한다. 그러나 돌아갈 집이 있는 은선과는 달리 수산나는 자신이 한국을 떠나며 돌아올 수 없는 일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리고, 이대로 고양이를 놔두고 떠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둘 사이의 간극이 커져 간다. 그사이 고양이 민디는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고, 비행기를 탈 날은 점점 다가오게 된다.

중앙역 광장에서는 월요일마다 반이민자 집회와 반이민자 집회에 반대하는 집회가 동시에 열렸다. 은선은 광장을 지나칠 때마다 뛰듯이 걸었다. 새로운 나라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새로운 굴욕에 익숙해져야 했다. 하지만 은선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굴욕에 익숙해진다는 건 굴복하는 셈이고, 굴복하는 순간 그들이 맞이할 결과는 패배였다.
우리를 위해서 참아야 한다니. 수산나의 방식은 너무 우아했다. 어쩔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것. ‘우리’라는 단어를 들을수록 은선은 수산나가 낯설어졌다. 수산나를 사랑했다. 사랑한다고 믿었다. 사랑해야 했다. 수산나도 그녀를 사랑하니까. 독일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들을 마음 놓고 털어놓을 수 있는 상대는 수산나뿐이었다. (16쪽)

부서진 마음과 무너지고 다시 무너지는 생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나겠다는 다짐과 결의

두 번째 이야기 「한스」는 독일 시골 마을에서 물리치료사로 일하는 한수와 그의 가정의 이야기이다. 감염병은 도시의 문제라고 여기지만, 동양인인 자신을 은연중에 무시하는 백인과 아랍계 치료사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마음을 다치기도 한다. 그는 독일인 치료사 미하엘과의 관계를 통해 인종과 계급 차별이 심한 이 시골 마을에 어찌어찌 정착해 살고 있다. 그러던 그의 병원에 어느 날 베를린에서 동양인이라 무차별 폭행을 당한 한국인 바이올리니스트가 환자로 찾아온다. 아랍계 치료사는 동양인이므로 그를 한수가 치료해야 한다고 하지만, 오히려 그를 담당하게 된 것은 미하엘이다. 그러던 중 미하엘이 고열이 발생해 출근하지 못하는 일이 생기고, 환자를 보러 간 한수는 무차별 폭행을 당한 한국계 환자를 만난다. 그는 자신을 폭행한 것은 독일인이지만 미하엘은 그들이 아랍계라고 주장했다고 말하며, 독일의 뿌리 깊은 인종차별을 폭로한다.

일식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할 때, 어느 독일인은 한수에게 물었다. 너희 동양인들은 웃을 줄밖에 모른다며? 그러고는 제 일행들과 무슨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되는 듯이 웃어댔다. 한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기만 했다.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이 마음속에 줄줄이 쌓이고 엉켰지만, 알고 있는 독일어 문장들은 너무 단순하고 짧았다. 귀갓길에서 그는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부탁 하나 해도 될까요? 날 함부로 바보 취급하지 마. (70~71쪽)

선명하게 드리운 폭력의 그림자에 비추는
미래의 빛과 기투하는 존재들

마지막 이야기 「수우」의 주인공 수아는 한국에서 온 건축 전공 석사유학생이지만 감염병으로 인해 실기 수업을 진행하지도 못하고 수입원이 끊겨 가난한 상황이다. 그녀는 어느 날 연보랏빛 편지지를 발견하고, 누군가에게 불현듯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그 결심은 과거에 돌보았던 한 아이와 그 아이의 할머니와 보낸 시간에서 비롯된다. 아이는 한국계 독일인으로, 수아의 이름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다. 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다소 괴팍한 성격의 할머니는 파독 간호사로 독일에 와 혈혈단신으로 삶을 개척한 사람이다. 그녀는 미래를 가늠할 수 없는 먼 나라로 와 가족을 일구었지만, 자식에게 원망을 들으며 손녀는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해 친구가 없다. 수아는 아이를 돌보면서, 아이와 자신을 향한 할머니의 서툴지만 따뜻한 마음을 알게 된다.

어느 날, 사무장이 숙자를 불렀다. 근무한 지 일 년이 넘었지만, 숙자의 독일어 실력은 여전히 형편없었다. 프라우 황. 사무장은 바싹 움츠러든 숙자를 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영어로 말했다. 무엇을 원하느냐고. 당시 독일 병원에서는 직원 복지를 위해 당구대나 자판기를 들여놓거나 파티를 열어주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통은 고참 간호사들의 의견에 따랐지만, 사무장은 숙자에게 묻고 있었다. 그래서 숙자는 말했다. 춤추고 싶다고.
사무장은 두 달 후 병원 로비에서 자선 파티가 있을 예정이라고 알려주었다. 숙자는 시내에 나가 처음으로 드레스와 구두를 샀다. 정말 원 없이 춤을 췄다고, 꿈꾸는 듯한 눈빛으로 말했다. (125~126쪽)

『안녕한 내일』은 감염병으로 인해 국경이 닫혀버린 독일에서 살아가는 이방인들의 이야기이다. 이들은 감염병으로 팬데믹이 선언되자, 질병과 인종차별, 가난 사이에서 이중삼중의 어려움을 겪는다. 작가는 주인공들이 겪는 이러한 어려움을 통해 국경 너머의 삶과 그곳에서 이뤄지는 관계를 조명한다. 정은우가 이들의 삶에서 관심을 두고 바라보는 것은, 어려움 그 자체가 아니다. “삶은 곧 싸움”이며 이들은 고국에서부터 이국에 이르기까지 매일을 싸워가고 있다. “싸움이라고 하면 차별에 저항하거나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투쟁을 떠올리게 되지만, 『안녕한 내일』은 나의 세계를 발견하고 확장해가는 과정”을 그러낸다.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전심전력”을 다하면서.「수우」의 주인공 수아는 영영 잊히지 않을, “앞으로 어떤 삶이 펼쳐질지 모르는 사람만이 지을 수 있는 미소”를 본다. 그것이 그녀의 미래를 살게 한다. “모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가능성. 그것이 정말 작가가 발견해낸 비전이라면 그가 앞으로 쓸 이야기는 누군가의 투지를 되살릴 수 있다는 의미에서 훨씬 강력해질 것이다. 작가는 어떤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이를 쓰게 만들고, 마침내 소설은 작가에게서 벗어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된다. 인물들이 불꽃처럼 투지를 품고서 저마다의 싸움을 치열하게 벌여가는” 이야기. 이 소설은 우리가 기다린 바로 그 이야기이다.

** 해설

선명하게 적히지 않음으로써 어떤 말은 더 강력해진다. 아무리 추측해본들, 작가가 직접 말하지 않은 이상 그 문장은 결코 확정될 수 없음에도 말이다. 수차례 다시 읽고, 빈자리를 상상하고, 그 근거를 마련하는 사이 떠오르는 문장들. 그런 의미에서 적히지 않은 말은 읽는 이가 쓰는 말이다. 작가는 어떤 자리를 비워둠으로써 읽는 이로 하여금 이를 쓰게 만들고, 마침내 소설은 작가에게서 벗어나 누군가의 이야기가 된다.